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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천재 화가와 부덕婦德의 상징 사이에서

2017-09-12 03:34 3,997


신사임당, 천재 화가와
부덕婦德의 상징 사이에서


2007년 11월, 한국은행은 2009년부터 발행될 고액권의 도안인물로 10만원엔 김구金九, 5만원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을 선정하였다. 신사임당은 5000원권의 이이李珥와 함께 모자가 함께 유통 화폐의 인물로 선정된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김구 선생은 큰 논란 없이 일찌감치 낙점되었으나, 사임당의 경우 장영실蔣英實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 진보적 여성단체의 관계자는 신사임당 선정과 관련하여 ‘바느질과 자수에 능하고, 영재교육에 특별한 결과를 냈다는 점이 우리 여성들에게 교감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대중들의 인식 속에 신사임당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사임당의 고액권 도안인물 선정을 응원하였다. 화폐 도안의 인물이 남성일변도로 흐르는 데 거부감이 드는 한편 그녀가 가진 예술적 재능보다 ‘현모양처’의 모습만이 부각되어 탈락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당시의 논란이야 어찌 됐든 간에 현재 우리는 5만원의 인물로 신사임당을 마주하고 있다.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길지 않은 생을 살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이자, 당대의 대학자를 길러낸 어머니로 우리 역사에서 사임당만큼 추앙받는 여성은 드물다. 앞서 언급한 여성단체의 관계자를 비롯하여 일반인들에게 신사임당의 천부적인 재능은 그동안 ‘현모양처인데 그림도 잘 그렸던 여인’이란 인식이 말해주듯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녀를 기억하는 시선이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모습보다 전형적인 전근대적 어머니의 표상으로 굳어진 연유는 무엇일까. 

 

신사임당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본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혹 ‘신인선申仁善’이라 전하는 자료가 보이지만, 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율곡이 어머니의 행적을 기록한 『선비행장先行狀』을 비롯하여 어디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사임당’은 당호堂號 1)로서 중국 고대 주문왕周文王 2)의 어머니 태임太妊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사임당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였으나 특히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여 조선 전기 산수화의 대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적벽도赤壁圖’ 등을 모사하며 화풍을 키워나갔다. 그녀의 실력은 살아생전에 이미 당대인들이 극찬할 만큼 뛰어났다.

 

1) 집의 호를 말하는 것으로, 그 집의 주인을 일컫기도 함

2) 상商 왕조를 멸하고 주周 왕조의 기틀을 다진 인물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신사임당을 안견 다음 가는 화가라 평하였으며,3) 시와 글씨에 능했던 소세양蘇世讓, 중국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쳤던 정사룡鄭士龍, 접반사接伴使 4) 역임 시 탁월한 능력으로 명나라 사신을 사로잡고 훗날 좌의정까지 오른 정유길鄭惟吉 등이 모두 하나같이 사임당의 그림을 극찬하였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자손들에게도 전해져 맏딸인 이매창李梅窓, 넷째 아들 이우李瑀가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쳤으며, 외손자(이매창의 아들) 조영趙嶸도 서화에 능했다고 전한다.

 

 

화가로서의 면모보다 그녀의 부덕婦德 5)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 시작은 그녀의 사후 한 세기가 지난 17세기부터로 파악된다. 당시 서인(그 중에서도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은 자신이 이끄는 정파政派의 결속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이를 더욱 위대한 인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3) 魚叔權, 『稗官雜記』 卷4.

4)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임시 벼슬로 정3품 이상을 임명하였음

5) 여자가 지켜야 할 떳떳하고 옳은 도리


그 과정에서 사임당은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의 모습보다 이이를 낳아 대성현大聖賢으로 키워낸 어진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더욱 부각됐다. 이러한 평가는 유교적 사회 질서의 고착화가 정점을 이룬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덕의 상징’으로서 그녀의 이미지에 쐐기를 박는 과정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 번 더 진행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순신 장군 성웅 만들기’ 작업과 함께 대표적인 한국의 여성상으로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한 신사임당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작업은 1970년대 중반에 구체화하여 사임당 동상 제작이 추진되었고, 사임당교육원이 설치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일반인들의 머릿속에는 ‘천재 화가 신사임당’이 아닌 ‘우리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새겨지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임당의 모습이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로서의 그녀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근래 불고 있는 ‘사임당 다시 보기’ 열풍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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